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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0616~0624 중국 실크로드 - 김준수 님이 보내오신 여행후기 입니다.
작성자 : 작성일 : 2023.07.07 조회 : 224 프린트

중국 실크로드 여행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두려움 저편에 존재한다.“ (잭 캔필드)


여행기간: 2023.6.16.~ 6. 24 (8박9일)

여행 여정: 서안(=한양릉) - 천수 (=맥적산) - 난주 영정(=백령사) - 장액(=칠채산) - 가욕관(= 가욕관 성루) - 돈황(= 명사산과 월아천/ 돈황석굴) - 선선(쿠무타크 사막) -

투루판(= 베제클릭 천불동 / 카얼정 .교하고성) - 우루무치 (바자르/ 천산천지) - 서안

여행 주관사: 컬쳐 투어

사실 실크로드가 열리기 전까지 서양과 동양은 너무나 멀고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닫힘과 단절에서 열림과 소통으로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문명을 낳았고, 키우고 오가게 한 길이다. 지구의 동서를 소통시키고, 인류역사의 어제를 오늘로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사막이나 산맥으로 막히고 바다로 말미암아 죽은 길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길이 되었다. 이로써 실크로드 길은 고행과 낭만이, 침략과 교류가 어우러지면서 모든 것을 아우른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공간적으로 멀면서도 가까이 우리 속에 있는 길이다. 그러기에 실크로드는 그저 관광이나 하는 낭만 가득한 하는 길이 아니라 역사와 문명과 종교의 동맥이고 살아 숨 쉬고 약동하는 모든 것의 원천과 요람을 찾는 여정이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이 처음 사용했다. 그는 실크로드를 크게 동쪽, 중앙, 서쪽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동쪽 구역은 서안에서 돈황까지 이르는 구간이고, 중앙 구역은 돈황에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곤륜 산맥과 북쪽의 천산 산맥을 에둘러 카슈가르에 이르는 지역이다. 서쪽 구역은 두 갈래 길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길과 곧장 서쪽으로 향하여 이란을 지나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번에 저희 일행이 선택한 구간은 중국 중원(中原) 지방 서안에서 시작하여 하서주랑(河西回廊)이라는 넓고 긴 협곡을 따라 이른바 하서사군(무위, 장액, 주천, 돈황)을 관통하는 구간이었다. 하서주랑은 기련 산맥을 따라 대륙을 연결하는 회랑처럼 길게 뻗어 있는 협곡을 일컫는다. 이 길은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에서 돈황에 이르기까지 장장 900여 km에 이르는 여정이며 이번 저희 일행이 택한 길은 서안에서 난주 그리고 돈황에서 우루무치까지 계산하면 무려 1,300km에 달한다.


옛날 로마인들은 동쪽 어딘가에 황금 섬(=중국)이 있다고 믿었고, 중국 또한 서역에 대해 항상 궁금해 하였다. 그러나 정작 동양과 서양은 B.C 100년까지도 서로 간에 교류가 없었다. 이러한 교류를 가로막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과 같은 자연 장애물과 아랍인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 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 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B.C 139년 장안을 떠난 장건(張騫)은 흉노와 티베트족에게 붙잡혀서 약 1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고,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본국으로 B.C 126년에 돌아왔다. 그의 경험과 자료가 워낙 중요하였기 때문에 한 무제는 치하 했다고 한다. 장건이 서역으로 갈 때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길을 이용했지만 돌아 올 때는 그 남쪽 길을 택해 돌아왔다.


저 역시도 2000년 5월 저희 한국 순교자 관구의 이름으로 중국 선교사를 파견하기 이전에, 1999년 김용권 바오로 수사와 함께 서안에서 피정 중이던 이 주교님을 만나기 위해 북경에서 서안을 처음 방문했었다. 어렵게 만나 뵌 이 주교님께, “저희 수도회가 중국 선교를 시작하고자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주교님의 답변은 여느 다른 주교님이나 신부님과 달리 지극히 원론적이고 영성적인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중국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말씀 한 마디가 씨앗이 되어 저희 수도회가 곤명-귀양-항주-성도를 거쳐 서안(=함양시 목가구)에 자리 잡도록 씨앗을 뿌려 주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999년 이후 네 번째 서안 방문이지만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중국 서안(=장안)은 신라의 고승 원칙圓測과 혜초慧超를 기리는 탑과 기념 정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서안은 혜초 스님께서 서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머물렀다. 서안에는 중국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말 그대로 비석으로 숲을 이룬 박물관이다. 이 곳에 보관되어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경교, 즉 고대 기독교의 일파인 네우토리우스파의 신앙적 교리와 의례가 간략하게 개괄되어 있다.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온 이래 약 150년 간(태종~ 덕종 5대) 중국에 전파된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비로써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와 발해 유적에서 나오는 협시보살의 십자가상 등 국내 고대 기독교 관련 유물은 경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17년 기독교 東傳史 연구의 권위자인 E.A,Goldon 여사가 금강산 장안사에 경내에 이 비의 모조품을 세우기도 했다.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1994년 11월 11일, 네스토리안교의 이단성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총주교 마르 딘카 4세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대화합 공동선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낙인찍혀 파문당한 지 1,561년 만에 이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모 마리아에 관한 양측의 차이가 동일한 신앙에 대한 다른 언어 표현상의 차이였다고 결론지었다. 하느님의 어머니와 그리스도의 어머니>

개신교에서는 아직도 네스토리안교는 이단으로 여겨지고 있기에 경교에 대해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로 바라보지 않고 있으며, 한국 가톨릭 교회사학자들도 당나라에서 부흥하고 발해와 신라에 그리고 원나라 시대의 고려에 신앙의 숨결을 남긴 경교는 아직도 관심 밖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 천주교의 전래는 이승훈베드로의 북경 세례 그리고 이벽과 권일신 등은 1784년 9월(음력)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세례를 받은 이후 김범우의 집에 모여 함께 신앙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를 발족시켰다. 이 신앙 공동체의 출현은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넓은 시선과 관점에서 경교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우여곡절 끝에 예정보다 거의 2시간 정도 늦게 출발한 저희 비행기는 서안 공항에 도착하여 복잡한 세관 수속을 받고 공항 근처에 있는 한양릉汉阳陵을 첫 번째로 찾았다. 한양릉은 전한 6대 황제 경제景帝(재위 B.C 157~141)와 황후의 합장릉으로 중국 최초의 현대적인 제왕릉 지하박물관이다. 발굴 현장의 보존과 상태를 살필 수 있도록 유리 통로를 걸으면서 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병마용갱과는 다르게 60cm 정도 크기의 무사, 시녀, 환관, 동물 등, 다양한 토용들이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해 두었지만, 30년 동안 발굴한 부분은 대략 1/4 정도라고 하니 그 크기가 대단하다. 개인적이 소견으론 병마용 보다 시대적으로 더 오래되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발굴 현장에 진열된 소장품이 소박하고 단순해서 더 친근감이 갔다.


서안에서 고속철로 천수까지 대략 1시간 20 정도 걸린다. 한무제 시절 하늘에서 은하수가 내려와 만들어졌다는 천수는 물이 귀한 감숙성 도시 중에서 그나마 물이 많아 비옥한 도시 중 하나이다. 서안 공항이 지리적으로 함양에 위치하고 있는데 함양 시내를 가로지른 강의 이름이 위하渭河, 또는 위수渭水인데, 이 위수가 천수 시내를 관통해서 지나가고 있다. 천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맥적산 석굴이 자랑이며, 중국 일대일로의 경로에 있어 그 어느 곳보다 변화가 활발한 도시다.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 낙양의 용문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이다. 천수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맥적산은 높이 142m의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거대한 봉우리로 산 모양이 보리 짚단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보리 맥麥 자와 쌓을 적積를 사용해서 맥적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후진 시기(384년 추정)에 시작되어 북위, 수, 당, 송, 명나라 까지 무려 1000년 동안 221개의 석굴과 10,632개의 흙으로 만든 불상과 조각, 1,300평방미터의 벽화를 남겼다. 그래서 맥적산석굴은 ‘중국 역대 왕조 불상조각의 전시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특히 정교하고 아름다운 진흙(니소)조각 예술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우리나라의 불상처럼 일반적인 원석을 통째로 깍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바위로 형태를 만들고 지푸라기를 섞은 찰흙을 덧붙여 만드는 석태니소 기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동쪽 절벽에 54개, 서쪽 절벽에 140개가 보존되어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될 때는 건축보다 불경과 불상이 먼저 들어왔고, 이와 함께 석굴사원 형식이 실크로드를 타고 그대로 중국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전래된 불교는 오아시스 도시마다 석굴사원이 세워져 천수의 맥적산, 난주의 병령사 석굴, 돈황의 막고굴,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원 입구에 버스를 주차하고, 공원입구부터는 전기 셔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사실 첫 번째 맞는 석굴이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잔도 길을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무사히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수직으로 80m나 되는 절벽에 무려 14층에 이르는 잔도를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폭이 비좁아 일방통행이므로 중간에 되돌아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원 한탄강 잔도 길은 이곳의 잔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중국의 잔도 건설 기술은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실이다. 하나의 절벽에 1천년을 두고 그렇게 많은 석굴을 조각했는데, 각 시대마다 불상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지 못하니 그저 대단하고 많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 때 감탄도 감동의 무게도 크기도 더 할텐데! 가장 눈길을 모으는 외부로 노출된 마애삼존입상인 13굴이다. 13굴은 맥적산에 현존하는 가장 큰 석태니소조상으로 만들 대불이다. 중앙에 있는 아미타불의 15,7 m이다, 전문가의 표현에 따르면 수나라 불상은 신체가 우람하고 장대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인데, 외부에 노출된 관계로 풍우風雨로 말미암아 훼손되어 송나라 때 보수하면서 둔중하고 얼굴도 둥글고 탱탱한 모습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양손을 잃은 것으로 보아 왼손은 왼쪽 무릎을 쓰다듬고 있고 오른 손은 가슴을 맞대고 시무애인施無碍印(=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베푸는 인상)과 여원인與願印(모든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 줌을 보이는 결인)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와 중국에 석굴사원이 유행한 것은 이 지역의 자연환경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에는 사암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설국사원의 전통이 없다. 그 대신 우리나라는 화강암의 나라답게 석굴사원 대신 마애불을 조성했다. 백제의 서산 마애불, 신라의 골굴암 마애불, 해남 대흥사의 북미륵암의 마애불, 영암 월출산의 마애불 등. 특히 경주 남산은 아예 마애불로 불국토를 재현했다. 인공석굴로 완성한 한국적 석굴의 대미는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입니다. 이는 인도와 중국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인공 석굴사원의 절정이며 우리 문화의 자부심이며 긍지입니다. 그러기에 석굴암의 부처 앞에 서면 종교 여부를 떠나 자연히 마음이 경건해지고 숙연해 집니다.


천수에서 고속철을 이용해서 천수를 떠나지 1시간 30분 만에 난주에 도착하였다. 난주는 서안시에서 400여 km 서북쪽에 위치한 감숙성의 성도이며, 황하 상류에 위치한 도시로 예전 중국 형제들과 티벳을 방문하기 위해 거쳐 간 도시이기도 하다. 난주에 도착해서 미리 대기 중인 전용버스를 타고 유유히 흐르는 황하의 경치를 감상하며 영정으로 이동하였다.


영정 호텔에서 머문 다음 날 이른 아침, 병령사에 가기 위해선 예전과 달리 1961년 완공된 유가협댐 공사로 조성된 비파호를 거슬러 작은 보트를 이용해 가야 한다. 브라질 아마존에서도 경험했지만, 보트를 타고 가는 도중 청정한 맑은 물과 탁한 황하의 두 물길이 합류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황하 원류는 탁하지 않고 맑은 물이었다. 탁한 황하석림을 감상하며 병령사로 이동하였다.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댐 건설로 생긴 비파호는 많은 마을을 수몰시켰고, 유가협댐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픈 역사가 잠겨있다. 거의 20여분 보트를 타고 접근하면서 점차 ‘계림이나 베트남의 땀콕과 하롱베이’를 연상하는 형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광대한 호수는 어느덧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괴석을 품은 채 보트를 타고 가는 우리의 마음을 재촉하는 듯하다. 병령사 선착장에 다다르자 절벽에 ‘병령사’라는 글씨와 함께 누각이 보인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隊商)들은 이곳에서 황하를 건넜다고 한다. 명나라 때의 어느 시인은 겨울의 병령사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병령사 산허리의 봉우리는冰靈寺上山如削 측백 숲 사이 용이 서린 듯한데 柏樹龍蟠點翠微 황하 포말 걸친 다리는 오죽 절경이겠는가況有冰橋最奇絶 은빛 무지개 곧게 뻗은 하늘 오르는 사다리로세 銀虹一道似天梯>


이 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에는 석굴 입구에도 물이 많이 흘렀던 것이다. 도착하고 보니, 한여름 무더위도 조금은 사라지는 듯하다. ‘병령’이란 말은 ‘향파병령(香巴炳靈)’의 줄임말로 티베트어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십만불(十萬佛)’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천불동(千佛洞)이나 만불동(萬佛洞)처럼 불상이 많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석굴은 길을 따라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43개의 석굴과 152개의 감실(龕室)이 있다. 그중 184개의 석굴과 감실이 기슭을 오르는 초입에 몰려있다. 석굴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169호굴의 ‘서진건흥원년(西秦建弘元年)’이란 명문(銘文)으로 미뤄보아, 적어도 420년부터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이후 불상과 벽화는 북위, 북주, 수, 당시대에 활발히 조성되었는데 대부분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토번(吐藩/티벳)이 이곳 지역을 차지한 763년 이후부터 병령사 석굴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 뒤 원나라 때에는 이곳에 라마교가 득세했는데, 그때 상당수의 벽화를 덧그리면서 라마적인 성격의 소상(塑像)들도 많이 조성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잦은 민족분규로 불상과 벽화가 많이 파손되었다. 169호굴은 병령사 석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데다 불상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특히, 결가부좌한 불상이나 입상(立像) 등은 간다라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이 서진(西秦)시대 이전부터 인도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준다. 452년, 북위(北魏)의 제5대 황제인 문성제(文成帝)가 불교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융성하게 되었는데, 제7대 병령사 석굴은 이 석굴을 대표하는 171호굴의 현암대불(縣岩大佛)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함께 있던 와불상(臥佛像)은 댐건설로 인해 반대편으로 옮겨져 있다. 이 거대한 현암 좌불상(座佛像)은 당나라 때 조성되었는데 높이가 27m다. 상반신은 천연의 돌기둥을 이용해 만들어졌고, 하반신은 찰흙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 석굴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각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점착력도 좋아서 많은 불상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석굴들을 감상한 뒤 옮겨 놓은 와불상을 보기 위해 반대편에 이르니, 현암좌불을 중심으로 병령사의 석굴 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보아도 웅장함이 돋보이는데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과 구법승이 오가던 전성기에는 얼마나 화려하고 웅대했을까. 오색찬란한 벽화와 단청의 전각들, 그리고 황금빛 불상들이 뿜어내는 광채가 어우러져 병령사 계곡은 그야말로 극락세계였으리라. 개인적으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보트를 타고 오고가는 황하석림이며 대자연과 어우러진 병령사의 풍광은 아마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답고 압도적이었다. 물론 한국의 사찰 또한 산중의 계곡과 명당자리에 잡고 있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가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 아제(가세 가세 저 피안의 세계로 가세)



난주로 귀환하여 특급 열차편으로 장액으로 출발하여 무려 5시간 40분 만에 늦은 저녁시간에 도착하였다. 장액이라는 지명은 흉노를 몰아낸 한 무제가 “흉노의 팔을 꺾고 중국의 팔을 펼치다(斷匈奴之臂 張中國之掖).”라고 한 말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처럼 장액은 그 명칭에서부터 서역과의 무역 거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유구한 역사와 문화,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 중국인들은 장액을 ‘금장액(金張掖)’이라 부르며 하서주랑의 도시 가운데 최고로 쳤다. 문화면에서도 서역불교의 전래와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장액에서 첫 번째 방문한 곳이 대불사(大佛寺)이다. 대불사는 서하 시기인 1098년에 창건되었는데 당시 이름은 가섭여래사(迦葉如來寺)였다. 2층 겹처마 구조의 정전에는 중국 최대의 실내 와불(臥佛)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 열반상인 이 와불은 길이가 35m, 어깨 너비가 7.5m다. 다리 길이만 4m터요, 귀는 2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와불 주변에는 부처의 10대 제자의 소상(塑像)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회랑에는 18나한상(羅漢像)을 배치하고, 천장에는 ‘24제천(諸天)’을 그려 놓았는데, 열반을 앞둔 부처님의 모습이 대전 전체를 장엄하게 만든다.


열반(涅槃)이란 번뇌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내가 열반에 들지 않은 지금, 나를 공양하는 것과 나의 열반 후에 공양하는 것은 마음이 평등하므로 얻는 복덕도 똑같다.” 부처의 이 말씀은 그의 열반 후에 탑을 세우거나, 열반에 드신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조성하여 공양하는 공덕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부처가 계시지 않아도 열반에 드신 모습에 공양함으로서 언제나 살아 있는 법신에 공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열반은 적멸(寂滅), 불생(不生), 적정(寂靜), 원적(圓寂)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처님의 입멸(入滅)은 열반이라 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라 하였다. 그것을 중국인들이 줄여서 열반으로 쓰면서 일반화되었다.


와불의 색채와 모습에서 뿜어나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단지 와불의 규모가 커서도 아니고 특별한 조형미 때문도 아니었다. 다른 종교의 성직자인 저에게는, 불자들의 숭고한 신앙심이 바탕이 되어 예배(禮拜)의 대상으로 모셔진 까닭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앙의 향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에 오늘 이곳을 찾은 불심佛心 없는 가톨릭 사제에게도 장엄한 분위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대불사에서 눈에 뛴 건축물은 바로 대전 뒷쪽에 있는 토탑이다. 토탑(土塔)은 높이가 약 34m로 티베트 양식의 백탑이다. 아랫부분은 흰색 항아리처럼 둥글고 윗부분은 흙으로 탑을 쌓았는데 꼭대기의 모양이 마치 왕관 같다. 특별히 대불사는 시내에 있는 사찰임에도 한가하고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 까닭은 대불사를 찾는 사람은 관광객 몇 사람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기운을 바탕으로 장액을 떠난 버스는 대략 한 시간 만에 ‘임택’에 위치하고 있는 <장액단하국가지질공원>에 도착하였다. 아주 오래 전 칠채산의 사진을 보고, 나의 버킷 리스트에 오른 곳이기도 하며, 지난 티벳트 여행할 때 오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칠채산은 오지 중의 오지이기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장액은 감숙성 하서주랑河西柱廊의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칠채산은 해발 1,850m에 위치하며, 동서 45km이고 남북 10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다. ‘단하丹霞’란 붉은 노을을 의미하는데 붉은 노을처럼 다채로운 色層의 흙산을 ‘단하지모’라하고, 단하지모는 오랜 시간 지질 활동을 거친 붉은색 사암이 풍화와 퇴적을 통해 단층화된 지형이다. 퇴적물의 종류에 따라 지층은 색깔을 달리하는데 하얀색 지층은 소금의 결정으로 칠채산이 옛날 바다였음을 나타낸다. ‘장액단하칠재풍구’의 입구는 동, 서, 북 3군데가 있으며, 각 입구마다 셔틀버스가 운영되고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저희 일행은 3군데 전망대에서 자연이 만든 수채화를 마음껏 관람할 수 있었다. 물감을 칠한 듯한 칠채산은 비온 뒤 색이 더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여 더욱 더 아름답다고 한다. 일출, 일몰, 계절, 날씨, 시간, 각도, 구름 그림자 등에 따라 같은 곳이지만 매번 다른 색채를 뜨고 있기에 매일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다채로움과 웅장함에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풍광을 감상하고 사진 찍느라 더위도 피곤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 순간도 지금도 칠채산의 전경을 바라볼 때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자유여행이었다면, 칠채산의 일출과 일몰을 당연히 볼 수 있었겠지만 아쉬움보다 만족한다. 사실 페루의 쿠스코를 갔었지만, 그땐 무지개산이라 불리는 ‘비니쿤카’ ‘레인보우 마운틴’에 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갈 수 없었던 아쉬움을, 칠채산을 보고서 위안을 삼았다. 정말 잊지 못할 곳, 그곳은 칠채산이었다.


이번 여행 구성원의 공통분모는 다들 과일을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칠채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맛보고 난 뒤, 지역 시장을 찾아 과일을 구입하였다. 무려 7년 만에 중국의 시골 시장에서 과일의 왕 두리안과 과일의 여왕 망고스팅을 구입해서 현장에서 먹었을 때 기쁨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묘약과도 같았다. 한 순간의 기쁨이었지만 행복했다. 가격은 한국보다 배가 더 저렴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임택을 떠난 다음 행선지인 가욕관을 향해 전용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가욕관은 (嘉峪關) 자위관시 남쪽 6km에 위치한 만리장성 서단의 제1관문으로 홍무 5년(1372년)처음 건축되었고. 20여 차례의 중건을 거쳤으며, ‘천하제일웅관’이라고 불린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산해관이 있다면, 서쪽 끝에는 가욕관이 있다. 그 길이는 무려 6,400km에 달한다. 가욕관은 군사요충지이기도 하지만 오아시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서의 역할도 한다. 예전엔 가욕관은 사막의 중심에 우뚝 선 군사요충지였지만, 지금은 능수버들이 드리워진 서역으로 가는 관문으로 실크로드 횡단에 있어 꼭 거쳐 가야만 하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성은 전체적으로 토벽으로 이루어진 외성과 벽돌을 쌓아 만든 내성의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군사방위체계를 따른 구조로 되어있다. 내성의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는데, 동쪽의 문은 “광화문(光化門)”으로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광휘가 두루 비춘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서쪽의 “유원문(柔遠門)”은 ‘회유로써 서쪽의 변방까지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화문과 유원문 밖에는 옹성이 둘러싸 보호하고 있으며 가욕관 내성 장벽 위에는 성루와 망루, 갑문루 등이 모두 14채가 배치되어 있다. 가욕관 관성은 만리장성의 수많은 관성 중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는 것들 중 하나이다. 성의 구조는 성벽 위에서 봐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오면 마치 독안에 든 쥐처럼 고립되는 구조로 방어에 최적화된 구조다. 철옹성 같은 이 구조는 그 누가 쳐들어와도 천하무적이 될 만큼 탄탄한 구조이다. 가욕관에 온다면 꼭 성벽 위를 거닐며 이곳의 지세와 성 구조를 살펴봐야 제대로 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가욕관에 있는 관제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이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삼국이 정립하던 시기 최대의 용맹을 떨친 장수다. 또한 1800여 년간 내려온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함께 최고의 주인공으로 꼽힌다. 관우가 평생을 중시한 것은 장수로서의 충의(忠義)이다. 이는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이 혼란을 수습하는 방책으로써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우 숭배사상이 발전하였고, 그 결과 관우는 마침내 무신(武神)의 반열에 오른다. 무신 관우의 영험을 받아 전쟁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제묘를 만든 것이고, 그와 짝을 이루는 문창각은 도교 숭배가 일반적이던 당시에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일체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인 관우에 대비하는 문신은 공자다. 그런데 관제묘 옆에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대신 문창각을 세운 것은 바로 도교신앙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 때는 문(文)을 숭배했기 때문에 학문 또한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 있었으리라.


예전 북경을 방문했을 때, 만리장성을 올랐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이 장대한 건물을 축성하기 위해 희생된 무명의 영혼들을 기억하면서 가욕관을 떠나 돈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며 떠났다.



돈황으로 들어가면서, 예전 NHK에서 야심차게 준비했던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 ‘타카하시 마사노리’가 작곡한 「돈황」이란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들어갔다. 사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1부 중국, 2부 돈황, 3부 사막, 4부 인도로 4개의 앨범>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가하시의 가장 대표적인 곡은 'caravansary'이며, '실크로드 다큐멘터리의 메인테마'로 잘 알려져 있다. 어쩌면 이 음악을 들었을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실크로드와 돈황에 대한 막연하지만 언제가 이곳을 찾아오리라는 꿈을 마음에 간직해왔다. ‘한서’ ‘지리지’에 보면, ‘돈(敦)은 대(大)요, 황(煌)은 성(盛)’이라 하였으니, 곧 ‘크게 번성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중국 학자들은 돈황을 인후(咽喉)에 비유한다. 마치 입에서 식도와 기도로 통하는 목구명과 같다는 의미로 동양문물과 서역문물의 병목지다. 동서 문명의 보물고, 미술관, 화용(華戎:중국인과 서역인)이 뒤섞여 사는 도시, 감숙성과 청해성 그리고 신장성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 지정학적 문명 교류사적으로 돋보이는 고장이다. 문명의 보고 , 국가의 보호를 받는 보물만도 59곳이나 된다.


서역에서 사막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은 돈황에서 만난다. 돈황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이처럼 돈황은 그 이름답게 동서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시대마다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나라 때 개척된 돈황은 당나라 때 전성기를 맞는다. 중앙아시아 및 서역 각국과의 교류가 더욱 확대되고, 각종 종교와 풍속들도 함께 들어온다. 바야흐로 돈황은 동서 문화의 교류지로서 백화난만(百花爛漫)한 사상을 꽃피운다. 특히, 불교문화의 응집과 번성은 돈황을 실크로드의 꽃으로 부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시내의 남쪽으로 들어서자 돈황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명사산이 나타난다. 역사의 고비고비를 슬기롭게 이겨 온 돈황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 도시 중심에 로타리에 우뚝하게 선 ‘비파를 켜는 처녀상’이 우리를 반기듯 손짓해 준다. 이 처녀상이 돈황의 흥망성쇠를 잘 보여주는 듯싶다. 도착 할 시간의 외부 온도가 무려 40도를 훌쩍 넘겼기에, 우리의 목적지인 명사산을 지나 호텔로 직행해서 여장을 풀고 일몰 시간에 맞춰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이 이번 여행의 버킷 리스트인, 명사산과 월아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결정이라는 것을 그땐 전혀 몰랐다. ‘이열치열’ 이란 말처럼 예정대로 그 시간에 갔었어야 했는데. 가이드 역시 변화된 상황을 전혀 몰랐기에 두고두고 아쉬웠다. 다른 일행은 사전에 명사산과 월아천을 알지 못했지만 칠채산과 명사산-월아천은 제가 이 여행을 선택한 이유이자 동기였다.


사막의 열기가 심하고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명사산이 위치했기에, 일몰 시간에 맞게 여장을 풀고 느긋하게 갔더니 주차장을 차단하고, 입구에서 아주 먼 곳에 새롭게 조성한 지원본부에서 복잡한 수속을 거쳐 전통차로 명사산에 늦은 시간 도착하였다. 중국 40대 관광명승지인 명사산鳴沙山(=모래가 윙윙 운다.)는 동서 길이 40km, 남북 길이 20km, 높이 1,600m데 달한다. 두 팀으로 나눠 낙타를 타고 명사산을 올랐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진 까닭에 명사산 오르는 시간이 일몰에 가까웠다. 그리고 40분 정도의 낙타 체험을 끝내고 모래산인 명사산을 오르면서 숨이 점차 빨라지고 마음 또한 서두르다보니 중간에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다. 고지가 저기인데, 정상에 서면 일몰은 볼 수 없지만, 월아천을 내려다 볼 수가 있을텐데... 하지만 제 몸 컨디션으론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멈춰야 했고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의 안타까움을 안고 모래 언덕을 내려왔어도 숨이 벅차올라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명사산에 오르지 못했지만, 명사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반달 모양의 월아천(月牙泉)이 선명하게 보인다. 월아천은 천연의 샘물이 만든 오아시스다. 이곳은 천 년이 지나도 샘물이 마르지 않고 거대한 명사산의 모래에도 매몰되지 않은 채,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신기루를 물리치고 사막을 건너온 이들이 월아천을 보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살았구나’를 넘어 종교적인 희열을 느꼈으리라. 눈물의 성수(聖水)를 마시며 감사함에 향불을 피웠으리라. 그리고 깨달았으리라.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살아있음에 보답하며, 살아있음으로 이를 전하는 삶의 고귀함을. 그 어떤 굳건한 신념과 정신을 가진 자도 욕심을 내려놓고 만족할 줄 알고 쉬어가는 법도 배웠으리라. 그러기에 청나라 때의 소이길(蘇履吉)도 돈황 팔경의 하나인 ‘월아천의 새벽 물빛(月泉曉澈)’에 매료되어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남겼다. <물 맑고 신령스런 명승지 월아천은 勝地靈泉澈曉淸 그 옛날엔 악와지로 불리었다네. 渥洼龍是昔知名. 상현달 같이 휜 물굽이에 一灣如月弦初上 반원형 맑은 물결이 거울처럼 밝구나. 半壁澄波鏡比明. 바람에 나는 모래는 샘물에 이르지 않고 風卷飛沙終不到 샘물도 모래를 넘지 않아 서로를 위하네. 潚含止水正相生. 모래와 물이 정자에서 만나 즐겁게 노니나니 竭來亭畔頻遊玩 향기로운 차 한 잔에 스스로 취하여 무르익노라. 吸得茶香自取烹.> 이토록 아름다운 월아천을 목전에 두고도 오르다가 지쳐 중단한 아쉬움을 이 시로나마 위로 삼아본다. 이젠 예전 이 곳을 찾았던 길손들과 달리 생수를 마시지도 못하고 그 낭만에 젖지 못했지만 분명 나그네들에게는 천혜의 생명수였을 것이다. 사막 한 가운데 기적처럼 형성된 월아천을 두고서 떠났다.



다음 날 아침, 돈황 불교문화의 핵심인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은 40㎞ 길이의 명사산이 끝나는 동쪽 계곡에 있다. 막고굴은 서기 366년. 낙준(樂僔)이란 수행승(修行僧)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삼위산을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삼위산에 비친 석양을 보게 되었는데, 산봉우리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고 수많은 부처님의 광명과 함께 하늘을 날며 춤추는 향음신(香音神)의 형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에 낙준은 이곳에 석굴을 파고 수행을 하였다. 당시 불교는 굴을 파고 정좌로 참선 수행하였다고 한다. <좌선은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 경계 따라 움직이지도 않아야 한다. 좌선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속세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이 필요한데, 명사산 절벽 아래 물이 흐르는 오아시스가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막고굴은 승려와 화가, 석공과 도공 등에 의하여 하나씩 정성스레 석굴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원나라 때인 13세기까지 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석굴이 개착되었다.


당나라 무측천(武則天) 시기에 이미 천 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인간과 자연에 의하여 파괴된 석굴도 많아 지금은 492개의 석굴만 남아 있다. 막고굴의 석굴이 많이 파괴되었음에도 1987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지정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불교예술지다. 막고굴은 당나라 때 가장 번성하였다. 이는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최고의 경제력을 축척한 결과이기도 하다. 전성기를 구가한 당 제국시기의 막고굴은 어떠하였을까. <눈 덮인 삼위산은 하늘 높이 솟고 雪嶺干靑漢 명사산 절벽에는 공중누각이 걸렸네. 雲樓架碧空 수많은 석굴이 겹겹이 늘어서고 重開千佛刹 사천왕상도 사방 곳곳에 나와 있네. 旁出四天宮 상서로운 난조(鸞鳥)가 구슬을 문 듯하고 瑞鳥含珠影 신령한 꽃들이 향내음을 풍기는 곳. 靈花吐蕙"242; 번뇌를 씻으면 유유자적의 경지에 이르나니 洗心游勝境 이참에 오염된 속세로부터 벗어나고 싶구나.從此去塵蒙>


막고굴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많은 관람객들로 붐볐지만, 외국인은 볼 수가 없다. 예약된 시간에 막고굴로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디지털 전시 센타의 영상관에서 20분 분량의 돈황에 관한 영화를 관람하고 난 뒤, 새로 지은 3D 영상관으로 이동하여 천장까지 꽉 차는 화면으로 막고굴에 관한 영상을 관람한다. 영상 관람 후 경내 셔틀버스를 타고 막고굴로 향한다. 22일 단오 연휴를 맞은 중국인들로 인산인해이다. 진정 실크로드 불교문화의 중심지인 것이 실감난다. 회랑처럼 늘어선 석굴들이 각자의 방 번호를 달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석굴마다 문을 만들어 불상과 벽화의 훼손을 방지하고 있다. 자물쇠가 굳게 잠겨있는 문들을 바라보자니 마치 석굴마다 스님들이 무더운 날씨를 이겨내며 ‘1000일 기도 무문관’에 들어간 듯하다.


안내인을 따라 석굴로 향한다. 이곳은 방문객의 국적에 따라 개방하는 석굴이 다르다. 현재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소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굴인데, 한국어를 나름대로 구사하는 현지 가이드의 소개로 328, 331, 16&17, 419, 427, 428, 237호 굴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굴이 바로 3층 누가 1층에 있는 16호의 곁간굴인 17호 굴이다. 이 굴이 유명한 것은 1,900년 막고굴의 주지 왕원록 도사가 쌓인 토사를 치우다가 갑작스레 벽이 무너지면서 발견했다. 마치 목동이 사해 문헌을 발견한 것처럼 우연하게 발견했지만, 이 곳에서 중요한 ‘둔황문서’가 별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굴의 다른 명칭은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한다.


이 굴이 특별히 한국인에게 중요한 굴인 까닭은 바로 신라 승녀인 혜초 스님이 남긴 불후의 서역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신라 혜초 스님이 723~727년까지 4년 동안 동천축국에서 불교 성지를 참배하고 중- 남 -서-북천축국을 순서로 다섯 천축국을 순례한 다음 서역으로 가서 대식국(=아랍)의 페르시아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의 몇몇 호국을 둘러보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쿠차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법현의 불국기’,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3대 서역기문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여행기는 불행하게도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다. 불자는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써 아쉬움과 안타까운 심정은 어쩔 수 없다. 1953년 백남준 박사가 유네스코 총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사본을 한 부 구해와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 그리고 2010년 국립중안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 기획전에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다른 굴 220, 335굴에도 조우관鳥羽冠(=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을 쓴 인물이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관람한 237호 굴 변상도에도 조우관을 쓴 한국인(=신라인)이 그려져 있었다. 아울러 428호 굴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비천상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 덕흥리에 고분 전실 천장에 그려진, 천마상을 연상케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막고굴을 포함해서 외국에 보관 중인 여러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우리와 당대의 중국과 관련된 종교 문화적 교류와 정치외교적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거울이며 문화유산임을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같게 한다. 아무튼 막고굴에서 나온 문서들은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쿠처어, 테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3만 여점의. 대분 불교 관련 내용이지만 동서교류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 인도 제당법 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포함, 사원의 경영기록이나 호적, 토지 문서 같은 公私문서 등. 그 보물들은 백년동안 명맥을 이어 오는 ‘돈황학敦煌學’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그런데 막고굴은 거의 반세기 동안 헝가리 지질학자 로치외 그 이후에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의 약삭빠른 이들에 의해 약탈 반출의 수난사를 겪었다.


천 년 동안 만들어진 벽화와 불상들이 약탈의 상처를 딛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석굴에는 왕과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염원을 위하여 돈독한 신심을 표현한 불상들이 앉았거나 누웠거나 서 있다. 석굴의 사방은 지상과 천상의 세계가 화려하게 피어 있다. 어느 것 하나 혼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은 불상과 벽화를 만들고 흡족했으리라. 평안과 극락이 여기에 있으리라 여겼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막고굴은 황폐하다. 그 옛날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요충지에는 제국주의의 문화재 약탈과 파괴의 흔적이 거세게 남아 있다. 그들은 흡족해하였다. 자국의 텅 빈 창고에 타국의 보물들을 빼앗아 채워놓음으로써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문화대국임을 자랑하였다. 그렇다고 정녕 문화대국이런가.


부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부서지고 빼앗기고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곧 새로운 극락을 건설하는 것임을 말이다. 비우고 내려놓고 다 주어버림으로써 보다 넓고 새롭게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전 세계가 ‘돈황학’으로 돈황을 알고, 돈황에 모여 ‘돈황학’을 더욱 승화시키리라는 것을 부처는 이미 오래전에 예견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감동의 막고굴을 돌아 나오는데 더 많은 인파가 입구에 길게 늘어선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순수한 영혼들이 만들어낸 찬란한 극락정토 막고굴은 비움으로서 이처럼 다시 차고 넘치고 있었다. 고요한 모습의 불상이 되돌아보는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 사이, 불현듯 다가오는 부처의 미소가 시대를 넘어 너무도 곱게 피어난다.


덧붙여 우리나라도 돈황 유물 보유국가로서, 2005년 용산에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아시아부가 따로 설치되어, 소장하고 있는 돈황과 중안아시아 유물들을 성설전시하고 있고, 특별전을 열기도 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 「누란」과 윤후명의 소설 「돈황의 사랑」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돈황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있다.



돈황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달려 유원 역에서 고속철도를 이용해 하미를 거쳐 선선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 아침 6시, 선선의 쿠무타크 사막의 일출 감상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간밤에 무려 30년 만에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큰 비가 내렸지만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약속된 시간에 도착했지만 직원들이 아직 자고 있었다.(북경과 2시간 차이가 나지만 동일한 시간을 외적으로 준수하고 있지만, 생활 패턴은 지역 여건에 맞춰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사막 지프차를 이용해서 사막을 곡예하듯 질주한 지프차 투어는 더욱 상쾌하고 흥분을 고양시켰다. 어느 정도 사막의 평평한 봉우리에서 기어오르듯 사막 정상에 이르자 기적처럼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일행 모두 감동과 감탄의 함성을 발산하기 충분했다. 아침에 뜻밖의 선물, 사막에 기적과도 같이 비가 오고 난 뒤 일출은 전날 ‘명사산’에서 즐기지 못한 일몰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도 남았다. 가이드 역시 우리 가운데 덕을 많이 베푼 분들, 신부님 두 분 때문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지난 시간 여러 곳에서 맞이했던 일출과는 전혀 다른 감동이었다. 분명 저는 근본 없고 근거 없는 믿음의 소유자인지 모르지만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서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일과 기적 같은 일을 늘 베풀어 주셨기에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일출이야 어디서든지 볼 수 있지만, 어떤 곳에서 맞이한 일출은 새로움과 함께 빛의 장엄한 축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을 선물처럼 던져 준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마음에 간직한 채, 우리는 투루판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투루판에 가기 위해 지나가는 여정 동안 선명하게 병풍처럼 다가오는 화염산火焰山은 화산 활동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에 침식되어 형성된 협곡과 산으로 용암이 녹아서 산 아래로 길을 내었고, 이런 침식 작용이 마치 불타는 형상을 갖추게 한다. 그런데 16세기 명나라 시대에 나온 소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현장이 이를 보고 ‘화염산’이라고 명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 등을 데리고, 불경을 가지러 인도에 가다가 서역에서 거대한 화염산에 부딪친다.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 불을 끄게 되는 배경지가 바로 화염산이다. 화염산은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의 톈산산맥의 황무지 절벽이자 언덕으로 붉은 사암 언덕이다. 화염산은 북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경계와 동쪽으로는 투루판 시와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이런 화염산을 스쳐 지나서 베제클릭 천불동 계곡에 도착하였다. 황량하고 기이한 산의 모습들. 역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다. 다만 협곡 사이에 흙탕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다. 사막에 이런 물이 흐르고 그 물로 인해 조성된 숲이 있다는 게 자연의 신비스런 광경이다. 이를 배경으로 깎아내린 절벽, 그리고 그 절벽을 파고 들어가 만든 석굴사원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고창국에서 6세기부터 14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가 정착하면서 천불동 석굴 역시 파괴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고, 이후 1898년 러시아 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의 존재를 발견한 이래 독일의 고고학자 르콕 그리고 그륀베델 탐험대 등은 베제클릭을 약탈의 현장으로 삼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벽화를 뜯어 가버린 바람에 천불동은 거의 폐허가 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온 노인이 전통적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불동을 닮은 듯 아련한 옛 추억을 일깨우는 느낌만 들었다. 여행 후 베제클릭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인용한 다음 글을 찾게 되었기에 참고로 천불동의 수난사를 올린다. 이 인용 또한 저 견해와 상반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이 저질렀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종교의 무지함과 난폭함을 새삼 강하게 느끼면서 문화재 훼손과 파괴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1928년에 그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 영국인 여행가 레지널드 숍버그 대령은 어떤 유적에서 폰 르콕이 프레스코 벽화 대부분을 뜯어갔다고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것은 정말 신이 도우신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무슬림들이 그 뒤로 남아 있던 벽화 거의 모두를 수치심도 없이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투르크 무슬림들의 광신적인 문화재 파괴 행위에서 그나마 라도 투르키스탄의 불교 유물을 구출한 것은 전적으로 유럽의 고고학자들 덕분이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른 유적에 대해서도 ‘벽화들이 입은 피해는 참담했다. 부처의 얼굴이 칼로 마구 그어져 있었고, 몇 안 남은 조각상들은 거의 다 파괴돼 버렸다’고 그는 썼다. 투르판 근처의 베제클릭 대사원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은 중국 당국이 몇 점 남지 않은 프레스코의 보호를 떠맡기 전에 이미 광신도들에 의해 (=아마 홍위병에 의해서도) 자행됐던 파괴의 현장을 증언할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아는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는 B.C. 4000~ B.C. 3000년경 큰 강 유역에서 발달한 최초의 인류 문명 발생지를 말한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강변의 이집트 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허 유역의 중국 문명이 있다. 이들 지역은 큰 강의 유역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며, 공통적으로 청동기, 문자, 도시 국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문명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은 불리한 자연환경의 도전에 인간이 성공적으로 응전한 곳에서 탄생한다는, 이른바 문명탄생의 ‘도전과 응전’원리를 주장하였다. 높은 산과 울창한 수림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난 마야나 잉카 문명은 토인비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투루판의 카얼정은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두루판(=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은 주위는 만년설로 뒤덮힌 고산지대(=동서 120km, 남북 60km)고 땅은 해면 이하(이스라엘 사해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지역이며, 움푹 패어 강풍이 불어대는 데다가 바싹 마른 사막 속의 오아시스 분지다. 한여름과 한겨울의 기온 차는 무려 60~70도를 헤아리며 증발량은 강우량의 180배나 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연환경의 극한 지대이다. 이런 극한상황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자연의 도전으로 여기고 과감하게 응전에 성공한 그 본보기가 바로 투루판의 카레즈와 포도이다. 호텔로 가기 전에 먼저 카레즈 (=카얼정) 박물관으로 갔다. 전시품을 둘러보고 나서는 박물관 지하를 관통하는 카레즈 현장으로 내려갔다. 카레즈는 우물과 지하수로를 결합한 일종의 인수(引水) 관개시설. 이러한 인수 관개시설은 일찍부터 세계의 여러 건조 지대에서 운영되었는데, 대체로 그 기원을 기원전 700년경 이란의 동부 사막지대로 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전파와 더불어 페르가나를 거쳐 중국 신장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한편 아랍 무슬림들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에 알려진 후 스페인에 의해 멀리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까지 보급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 카레즈가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온 곳은 중국 신장 지역이다. 따라서 신장 카레즈에 관해 국내외적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신장 투루판의 카레즈 구조는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직으로 파내려간 우물인 수정(垂井), 우물과 우물을 잇는 물길인 암거(暗渠), 하구로 내려오면서 땅 위로 드러난 물길인 명거(明渠), 그리고 물길의 종점에서 물을 저장하고 배수하는 저수 댐 격인 노파(澇垻)다. 한 갈래의 카레즈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십 개의 우물을 파야 한다. 카레즈의 물길은 천여 갈래나 되며, 한 갈래의 길이는 수 km에서 수십 km에 달한다. 전체 연장 길이는 무려 5,000km나 된다. 중국에서는 이 카레즈를 경항(京杭) 운하(=북경에서 항주에 이르는 3,200km; 1995년 처음 중국 방문했을 때 이 운하를 거슬러 올라갔다.)와 만리장성에 비견되는 중국 3대 역사(役事)의 하나라고 평가한다. 인부 3~5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한 갈래를 파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린다고 하니 카레즈야말로 이곳 투루판에 살았던 사람들의 숱한 희생과 노력의 결과였다고 생각하니 인간 승리의 표징이자 끈기와 지혜로 이루어낸 문명의 귀중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카레즈가 엄혹한 자연환경의 도전을 이겨낸 문명의 실례라면, 2천년 강 가꾸어 온 포도는 이런 자연환경을 슬기롭게 활용함으로써 이루어낸 또 하나의 귀중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전 지식을 마음에 새기면서 신강 위그루 족의 아부라이티 가족 포도 농원을 방문해서 시원하고 달디 단 수박 대접과 함께 고유 전통 춤을 관람하면서 한낮의 오후를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투루판은 사방이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사막 속 작은 분지 오아시스다. 기복 무상한 역사 속에서 두루판은 혈통을 달리하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지역으로 변해왔다. 하지만 민족적 다양성보다 문화적 다양성은 그 폭이 훨씬 더 넓은 데, 그 중심에 종교가 내포되어 있다. 고대에는 주류인 불교에 유교나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의 동서 종교가 합류되었다면, 중세부터는 그 주류가 이슬람교이었다.


투루판 북서쪽으로 10㎞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을 따가운 햇살을 뚫고 도착했는데. 이 성은 토성의 양쪽에서 흐르는 강을 바탕으로 섬처럼 자연스럽게 조성 진흙 토성이다. 이렇게 조성된 교하고성은 두 갈래의 작은 강을 교차하며 끼고 돌아 적의 침입을 자연스럽게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나 다름없다. 교하는 자연스런 해자垓字 기능을 한 셈이다. 성 아래 입구에서 바라볼 때는 외견상 진흙 토성에 불과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하고성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를 둘러본 후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를 깨달을 정도로 받은 느낌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외견상 폐허화된 잔재만 남아 있었지만, 혹독한 자연 조건 속에 남아있는 문명과 문화의 흔적은 후세에 그곳을 찾아 온 이방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도 남았다. 교하고성은 기원전 2~14세기 사이에 존재하던 고대 서역제국의 하나인 교하라는 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차사전국(車師前國)의 도시인 교하고성은 서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역사를 구가했던 곳이다. 7세기 중엽 당 왕조가 교하성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13세기에 도로 폐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 높이의 벼랑 위에 가로 300m, 길이 1천650m의 고성터 내엔 남북을 관통하는 큰 길을 따라 주거 및 행정관가 등의 건물들이 다채롭게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뜨거운 햇살 아래, 2시간 정도 넘게 여기저기 팻말에 적힌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더위를 피하고 외부에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깊이 지하를 파서 만든 생활공간 그리고 생존에 필수적이 우물 흔적 등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성터 끝쪽에서 협곡 사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울창한 숲과 밭, 그리고 강이 소리 없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세차게 부는 바람소리가 울어대는 절벽 곳곳에 박힌 나무 계단 등을 이용해 물과 과일 등 음식을 올려 보내곤 했을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의 삶의 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인간의 자연과 상생하고 공존하는 생존 능력의 강함과 끈기에 다만 감탄할 뿐이다. 편안함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불편함과 힘듦을 견딜 수 있을까?



투루판의 끝없이 펼쳐진 포도 농원을 지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우루무치로 향했다. 예상과 달리 사전에 신장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권 검사가 쉽게 끝나서 큰 불편 없이 우루무치를 들어갈 수 있었다. 3시간 동안 잘 만들어진 고속도로 따라 달리면서 버스 차장으로 스쳐 지난 이름도 모를 험난한 산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지역에 조성된 풍력 발전단지 그리고 염호鹽湖(=소금호수)를 지나면서 피곤함도 잊은 채 낯선 곳을 망연히 바라보면 우루무치에 입성하였다. 연휴라 교통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예정대로 우루무치 바자르(시내 중심지에 있는 유명한 전통시장)를 탐방하였다. 중국 속의 또 다른 중국의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시장의 이곳저곳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잠시나마 위구르인의 생활과 그 생활에 필요한 식품과 향료 등 다양한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먼저 든 생각은 한국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이 아니라 베트남 호치민의 벤탄 시장이 떠올랐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시장!!! 시내 중신부에 있는 호텔에서 외식신에 호텔 뷔페를 마련해 주어서 우루무치에 이르기까지 여독을 풀 수 있는 질 좋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었다. 특히 바다에서 가장 먼 우루무치에서 회와 다른 해산물 그리고 포도주로 아름다운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우루무치를 둘러싸고 있는 천산, 만년설산의 절경을 품고 있는 천산의 천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천산의 천지를 캐나다의 레이크 루이스와 비교하지만, 루이스를 다녀 온 저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높은 산 위에 있는 천산의 천지에 도착했을 때 흐린 날씨 때문에 밝게 빛나는 에메랄드 호수라기보다는 짙은 청색의 호수가 조금은 쓸쓸함을 풍겨왔다. 둘레 길 대신 시간 관계상 보트 투어를 하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누리는 호사를 누렸다. 잔뜩 흐린 산을 내려와서 보니 따가운 햇살이 피부를 자극했다. 이로써 실크로드 여정의 대미를 장식한 천산의 천지 관광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해서 서안으로 출발하였다.


서안에 도착해서 종루 근처의 유명한 딤섬 식당, ‘덕발장’에서 만두 코스 요리를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사실 저는 처음 서안을 방문했을 때 덕발장을 다녀갔었는데, 세월이 흘러 코스 요리에 전채가 요리가 나와 다양해졌지만, 그때 보다 맛은 그저 그랬다. 이렇게 실크로드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 서안 성벽 공원을 산책하고 난 뒤, 대한항공 편으로 서울로 되돌아 왔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하더니만 확실히 내 집이 편하게 느껴진 것 사실이다. 하지만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을 때 여행은 가야하고 고생보다는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것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여행 기간 보다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여행이란 결국에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 가’를 되묻는 시간이었고 공간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내 기억의 퇴적층에 또 하나의 퇴적물을 올렸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보면 새로운 퇴적물도 오래된 퇴적물에 살며시 스며들어 있겠지! 그리고 그게 삶의 침전물처럼 겹겹이 쌓여가는 인생사를.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km 대장정】 조선일보 2013.11~2014.6월 연재 기사에서 한시 부분 (=병령사/명사산/막고굴)을 인용하였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과 2에서 간접적으로, 부분적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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